황금빛의 땅 나주 1.


나주에 간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한다. ‘어떤이?’ 한참을 고민하다가 음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은 “나주곰탕!” 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가 답했습니다. 하지만 짧고 알찬 2박 3일의 나주 여행을 마치고 곰탕 대신 확실한 답을 해줄 무언가가 떠올랐다.

나주평야의 황금빛 보리밭과 아직 잠들지 못한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고 한다.
전라도 하면 보통 전주나 광주를 떠올리는데, 전라도라는 이름이 전주와 나주를 합쳐서 호남의 중심이 된 곳이 바로 나주였다.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은 당시 금성군인 나주를 중심으로 세력 기반을 마련하고, 금성군에서 국가로 승격시켜 이름을 나주로 고쳤다.

훗날 나주목이라 불리며 8개 권역의 하나가 되었다. 그 결과 나주는 왕건이 점령하기 전에는 광주에 뒤처졌지만 후에는 광주를 넘어섰다. 왕건이 나주에 오지 않았다면 전광도였을지도 모른다. 고려 성종 2세(983년)부터 조선 고종 33세(1896년)까지 나주는 2군 8현을 가진 전라남도 최대의 마을이었다. 천년도시’의 전통을 간직한 도시.

공교롭게도 올해도 1,000명을 맞았다. 전라도라는 이름의 기념일을 맞아 오랜 세월에 걸친 나주의 문화유산을 되짚어보는 기나긴 여정을 떠났습니다.

이 여정의 서사는 나주평야에서 시작되었다. 나주평야는 발을 딛고 눈으로 봐야만 알 수 있는 곳이다. 나주평야는 비옥한 땅의 천혜의 땅인 전라도에서 호남평야 다음으로 큰 곡식 저장 지대이며 영산강 한가운데 나주 일대에 넓게 펼쳐져 있다. 온난습윤한 지형적 특성으로 예로부터 농업이 발달하여 삼백지방이라 하여 쌀, 면화, 누에고치의 생산지로 유명하고 보리와 고구마, 마늘, 양파와 야채. 특히 나주평야에서만 연간 5만톤 이상의 쌀이 생산된다고 한다.

배·복숭아·포도·감·사과 등도 영산강변 구릉지에서 재배된다. 나주하면 떠오르는 나주배는 영산강 유역의 비옥한 황토에서 자라며 과육이 부드럽고 당도가 높아 나주를 대표하는 과일이다.


나주금학헌

이처럼 나주평야는 풍부한 농산물과 비옥한 토지로 인해 식민지 시대의 대표적인 약탈 대상이었다. 일본, 동양척식(주) 설립 특히 1920년대에 일본은 한국의 쌀 생산량을 늘리고 쌀을 싸게 대량으로 사들였으며 쌀과 기타 자원을 쉽게 수송할 수 있도록 철도와 도로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식민통치 하에서 조선인민은 극심한 식량부족에 시달렸고 결국 농토를 빼앗겼다.

나주평야의 아픔을 알고 나니 금빛으로 빛나던 땅이 나약해 보인다. 지금은 풍족한 먹거리가 우리에게 활력을 주지만 과거 이곳에 살던 선조들은 일제의 탐욕과 폭정으로 얼마나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을까. 인적이 드문 곳에 잠시 차를 세우고 나주평야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황금빛 보리밭 여기저기서 노랗게 익은 보리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부딪히면 귀를 간질이는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 아름다운 풍경에 푹 빠져 이야기의 아픔도 금새 잊혀지리라.

돌아서니 나주 평야의 들판을 따라 늘어선 집들이 평화롭게 생각났다.